전통적으로 인도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발언권이 많지 않았다. 이 점은 어느 나라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자리에서도 여성들이 입을 다물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실제로 고대 인도를 거슬러가다 보면 유명한 대화에 여성이 끼는 경우를 적지 않게 찾을 수 있다. 24쪽
전통적으로 인도인들의 논쟁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닐뿐더러 특정 계급과 카스트에 국한된 특권도 아니었다. 특정 종교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사회적 약자들도 많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불교가 인도에서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확산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성직자 계급의 우월성에 도전하는 행위는 불교뿐 아니라 자이나교를 포함하여 초기의 반체제적 종교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반골 성향은 인간 평등을 외치는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특권층에 도전하는 논쟁의 본질을 이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저항과 불복종은 초기 불교와 자이나교 문학의 핵심이다. 27쪽
인도 역사에서 지칠 줄 모르고 고개를 드는 카스트 제도에 대한 저항세력들은 정통 체제에 의문을 던질 때 논쟁을 잘 이용했다. 한참 후대로 내려와 15세기에 자리 잡은 중세 신비주의 시인들의 계보에는 힌두교의 박티운동(카스트제도를 거부하고 신에 대한 개인적 믿음을 강조했던 운동)과 무슬림의 수피종단의 평등주의에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여러 사회적 장벽을 거부하면서 카스트와 계급 분할을 놓고 예리한 논쟁을 펼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천한 출신이었던 이들은 종교의 장벽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할에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면서 인위적 구속을 우습게 여겼다. 이런 이단적 견해를 드러낸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계급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29쪽
공개 토론의 전통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인류 공통의 유산이다. 32쪽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에서 자신이 민주주의를 배운 것은 아프리카 지역대표회의에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할 말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발언했다. 추장이나 부락민, 전사나 의사, 가게 주인이나 농장주, 지주, 노동자 할 것 없이 누구근지 입을 열면 모두가 경청해주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시민으로 평등한 가치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바로 자치의 기반이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49쪽
아마티아 센, 살아 있는 인도 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도의 숨은 저력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아마티아 센은 인도인으로서, 세계적 석학으로서 인도의 역사, 종교, 정치, 문화, 사회 전반을 통찰력 있게 분석해냈다. 그는 인도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깊이 있는 분석을 통해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문제점을 밝혀내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마티아 센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인도를 이해하려는 것 이라 밝히고 있다. 그는 동시에 세계의 문화를 분류할 때 인도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그저 ‘힌두교의 나라’로만 정의하는 과오를 꼬집는다. 즉 인도에는 풍부하고 다양한 전통이 있는데도 인도를 종교의 나라, 절대적 신앙과 굳어진 관습의 나라로 보는 고정관념 때문에 이 같은 전통이 곧잘 무시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흔히 인도에 꽤 호의적이라고 알려진 몇몇 문화학자들도 서구의 합리주의, 과학 중시 태도와 대조되는 것으로 인도의 종교 지향적이고 비합리적인 문화를 말한다. 아마티아 센은 이런 주장은 결국 인도의 지적 유산의 큰 부분을 놓치게 만든다고 강조한다.
이런 논조를 바탕으로 저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인도의 특수성, 다양성, 가능성을 크게 4개의 장에 걸쳐 밝히고 있다. 인도인으로서 인도의 가장 내밀한 정체성을 포착하고 세계적 경제학자로서 인도의 과거와 현재를 객관적으로 분석한 저자의 통찰력을 따라가다 보면 그간의 인도에 대한 단편적인 시선을 넘어, 인도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화와 유연한 학문적 전통, 사고방식을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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