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그리운 여우


여우가 되어 돌아온 친구 이야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깥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산길에는 마을로 내려갈 때를 놓친 산수유 열매가 어쩌면 붉어져 있기도 했을 터인데 뒤도 안 돌아보고 여우 한 마리가, 우리집 마당에까지 와서 부르르 몸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털며 이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기웃거릴 것이라 혼자 생각하고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타구니 속에 두 손을 집어넣고 쪼글쪼글해진 그리하여 서늘하기도 한 불알을 한참을 주물러보는 것인데 그러면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와 함께 나는 혹시나 여우 한 마리가, 배가 고파서 마을로 타박타박 힘없이 걸어내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사람 소리 하나 안 나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것이 없나 하고 살피다가 일찍 군불 지펴 넣은 아랫방 아궁이가에 잠시 쭈그리고 앉았다가 산속에 두고 온 어린것들을 생각하고는 여우 한 마리가, 혹시라도 마른 시래기 걸린 소도 없는 외양간 뒤벽에 눈길을 주다가 코를 벌름거리며 그 코끝에는 김나는 이슬 몇 방울이 묻어 있기도 할 것인데 아 글쎄 그 여우 한 마리가,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더러 탁탁 쳐보기도 했을 터인데 먹을 것은 없고 눈은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도 서러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 문득 몇 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제껴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 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 하고 가슴도 한없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안도현, 「그리운 여우」 눈이 많이 오는 밤이다. 아이들은 눈이 오면 팔짝팔짝 뛰며 좋아한다. 눈에 대한 낭만이 마음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어떨까?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갇혀서”라고 시인은 쓴다. 시인은 희고 통통한 방안에서 바깥에 있을 또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 그 세상에도 여기처럼 눈이 많이 내린다. 그곳에는 누가 있을까? 시인은 여우 한 마리를 상상한다. 그냥 여우가 아니다.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하얀 눈발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온다. 시인을 홀리기 위해서이다. 한밤에 눈을 맞으며 산에서 내려온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를 떠올려 보라. 시인은 눈 내리는 밤에 설화 속 세계로 들어선다. 그는 방안에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방안에 있는 게 아니다. 상상은 시인을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집 마당으로 들어온 여우가 부르르 몸을 흔들어 깃털에 쌓인 눈을 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품새가 집에 사람이 있나 없나 탐색하는 눈치다. 시인은 무엇을 할까? 방안에서 메주 냄새가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춥다. 두 손을 사타구니 속에 집어넣어 쪼글쪼글해지고 서늘해진 불알을 한참이나 주물러본다. “나도 모르게 불끈 무엇이 일어서는 듯한 생기”가 느껴진다. 그 생기로 시인은 다시 상상을 펼친다. 여우 한 마리가 배가 너무 고파 타박타박 마을로 걸어내려온다. 사람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 뒤꼍에서 두리번두리번 먹을 걸 찾는다. 배가 고픈 것도 고픈 거지만 여우는 또 한없이 춥기도 할 것이다. 일찍 군불을 지펴 넣은 아랫방 아궁이가에 여우는 잠시 쭈그리고 앉는다. 따뜻한 기운이 몸을 데운다. 산속에 두고 온 어린 것들을 생각하고는 이내 여우는 몸을 일으킨다. 먹을 걸 찾아 빨리 산속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먹을 건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여우는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마른 시래기가 걸린 외양간 뒤벽에 눈길을 보내다가 여우는 이내 코를 벌름거리며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야속해서” 세상을 차듯 뒷발로 땅바닥을 탁탁 쳐보기도 한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은 없다. 산속에 있는 새끼들을 먹여야 하는데 먹을 걸 전혀 찾을 수 없다. 여우 눈이 흥건히 젖는다. “지지리도 못난 삶의 머리끄덩이처럼” 내리는 눈을 보니 여우는 저 깊은 곳에서 서러움이 밀려온다. 겨울에 내리는 눈만큼 산속 동물들을 서럽게 하는 게 있을까? 눈이 내리면 움직이기가 힘들고, 움직이지 못하면 먹이를 얻기도 어렵다. 시인은 상상 속에서 배가 고파 서럽게 우는 여우를 떠올린다. 그러다가 문득 시인은 몇 해 전에 얼음장 밑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를 기억 속에서 불러낸다.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라는 시구에 드러나는바, 시인은 상상 속 여우를 죽은 동무와 연결시키고 있다. 설화=상상이 현실로 들어오는 지점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상상이 현실이 되자 시인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젖힌다. 죽은 친구가 살아있는 친구가 보고 싶어 오지 않았는가? 처음부터 반갑게 맞아야 할 상황인데, 시인은 지금까지 상상에만 빠져 미처 친구를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다급한 마음에 문을 열어젖힌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로 시인은 그 상황을 표현한다. 여우는 상상 속에만 존재해야 한다. 죽은 친구가 여우로 변하는 상황 또한 상상 속에서만 일어난다. “아아,”라는 감탄사로 시인은 현실과 설화=허구 사이에 놓인 거리를 확인한다.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린다. 눈이 내리는 건 현실이다. 이야기 속 공간에서 내리는 눈은 여우를 불러들이지만, 현실에서 내리는 눈은 여우를 불러들이는 주술성을 내보이지 못한다. 설화 밖으로 뛰쳐나온 여우가 죽은 친구가 되어 시인 앞으로 오면 좋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시인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시를 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을 그는 시 언어로 만든 공간에서 이루려고 한다. 시인에게 시는 꿈을 실현해 주는 장소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밤이면 시인은 시를 쓰며 여우를 그리워하고, 죽은 친구를 그리워한다. 눈 내리는 밤이면 죽은 친구는 여우가 되어 마을로 내려온다. 시인이 어떻게 밤에 쉽게 잠을 이루겠는가? 죽은 친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시인은 여우가 사는 설화 세계를 경유해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여우가 사라진 마당에 시인은 우두커니 서 있다. 겨드랑이에 눈발이 내려앉는지 그쪽이 근질근질하다. 가슴도 한없이 짠하다. 죽은 친구를 다시 볼 기회를 놓쳤으니 밤에 잠을 자는 건 이미 글렀다. 죽은 친구는 자꾸만 떠오르고, 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시인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다른 세계에 있는 여우는 서러운 마음으로 배를 곯는 새끼들을 찾아 산속으로 들어가고, 살아있는 친구를 못 만난 죽은 친구는 쓸쓸한 걸음으로 제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식민지 시대 시인인 백석의 시법(詩法)을 빌려 시인은 여우 한 마리가 마음속에 일으키는 물결을 잔잔하게 표현한다. 서러움이 순간적으로 치솟는 순간이 있지만, 시인은 잔잔한 마음 물결을 따라 시를 쓴다. 그리움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어느 순간 화산처럼 터져 오르다가도 이내 가슴 한켠으로 내려앉는 게 그리움이 아닌가? 죽은 친구를 갈무리한 자리에 시인은 그리움을 묻는다. 마음이 짠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운 누군가를 가슴에 묻어야 눈 내리는 밤에도 잠을 잘 수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 서정시에 뿌리를 대고 시대적 문제와 마음의 갈등을 다룬 시집. 시인의 시선이 가닿고 머물면 그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활기를 되찾는다. 생활과 밀착된 맑은 시심이 속깊이 박힌 시편들이 중심을 잃지 않고 잘 자란 나무처럼 다가온다.

제1부
겨울 강가에서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눈 그친 산길을 걸으며
봄비
측백나무가 되어
여울가에서
산에 대하여
모악산 박남준 시인네 집 앞 버들치에 대하여
제비꽃에 대하여
애기똥풀
깃털 하나
제비꽃 편지
가을의 욕심 1
가을의 욕심 2
인간의 폭
여치
무식한 놈

제2부
사랑
단풍나무 한 그루
그리운 여우
그 겨울밤
화엄사, 내 사랑
화엄사, 깨끗한 개 두 마리
비행기고개를 넘으며
열심히 산다는 것
나의 희망
또 하나의 길
생(生)
은행나무
나와 잠자리의 갈등 1
나와 잠자리의 갈등 2
나와 잠자리의 갈등 3
단풍나무
혼자 사는 집
눈 오시는 날

제3부


정든 세월에게
냉이꽃
봄밤
제비집
등나무 그늘 아래에서
바람이 부는 까닭
가뭄
나뭇잎 하나
이 가을에는
우주
억새밭에서

대숲이 푸른 이유
인생
문상(問喪)
장엄한 가난
검은 구멍
겨울산에서 뉘우치다

제4부
산서면(山西面)
지상의 방 한 칸
4월에 내리는 눈
3월에서 4월 사이
순댓국 한 그릇
길 따라
생일
객기
외로움
경계
부끄러움에 대하여
성자(聖者)의 미소
정미소가 있는 풍경
수학여행
퇴근길
봉급 받는 날
세상의 중심을 향하여
오수역에서

발문/이병천

후기